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이난 전쟁 (문단 편집) === 타바루자카 전투 (3월 1일 ~ 3월 30일) === {{{+2 田原坂の戦い}}} '''세이난 전쟁 최대 격전지'''.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전을 벌이고 있는 정부군을 구원하기 위해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만 5천명의 군대를 보낸다. 이에 맞서기 위해 사이고는 공성중이던 군대의 절반을 보냈다. 양군이 대치한 곳이 타바루자카(田原坂)였다. 지형적으로 정부군 입장에서는 구마모토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거운 대포를 끌고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 유일한 언덕길이었고, 사쓰마 군에게는 가토 기요마사가 그 시절부터 방어용으로 개발한 곳으로 숨어서 매복할 수 있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구마모토 성 포위전이 진행되던 시점에서 사쓰마군 전위대는 정부의 구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노기 마레스케]]가 지휘하는 코쿠라 제 14연대를 3번에 걸쳐 연파하였으나 연락수단의 부재로 추격섬멸에 실패했다. 그러던 와중 정부군이 타카세 방면에 집결중이라는 정보를 얻은 사쓰마군 주력이 타카세로 진격하여 세이난 전쟁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전력을 회복하여 사쓰마군이 물러선다. 사쓰마군은 구마모토성 북방의 키치지 고개, 타바루자카, 야마가, 미노타케, 가와치 해안에 이르는 약 40km의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특히 타바루자카와 키치지 고개 사이에는 참호와 화력거점을 설치한 참호선을 구축했다. 신정부군은 하루라도 빨리 구마모토성을 구원해야 했기 때문에 타바루자카 정면에 대한 총공격을 결의하고 1877년 3월 3일 타바루자카를 주공, 키치지 고개를 조공으로 삼아 돌격을 개시하지만 사쓰마군의 십자포화, 참호에 육박하면 [[발도 돌격]]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공세는 돈좌된다. 그러나 사쓰마군도 키치지 고개를 방어하던 1번 대대장 시노하라 구니모토(篠原国幹)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정부군은 이에 대해 타바루자카를 공세중점으로 삼아 물량을 동원한 화력전으로 맞섰으며, 이때의 탄약소비량은 일일평균 32만 발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대다수는 징집된 평민병사들로써 화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효과도 부족하고 특히 발도 돌격만 시작되면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참살당하거나 도주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에 경찰 [[발도대]]를 편성하고 사족 출신이 많은 포/공병에서 저격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타바루자카 측면 요충지인 요코히로야마 점령에 나섰다. 사쓰마군도 요코히로야마 방어를 위해 7연발 스펜서 연발총 40정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발도대의 발도 돌격과 저격대의 정확한 사격 속에 마침내 요코히로야마를 점령하여 타바루자카 방어선 돌파를 실행하게 된다. 3월 20일, 타바루자카를 남쪽에서 우회하여 사쓰마군의 7번 포대를 기습한 정부군은 폭우로 방어선이 약화되고 사쓰마군이 쓰던 전장식 소총의 불량률이 높아진 점을 이용하여 전선 돌파에 성공한다. 이로써 타바루자카 방어선은 함락되지만, 사쓰마군이 재역습을 감행하여 사쓰마군 전선은 다시 고착화된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한 것은 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 충배군으로써 사쓰마군은 결국 방어선을 포기하고 퇴각, 4월 15일에 구마모토성은 해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